으름

정판수(jps1217) 기자

▲ 한 달 전, 으름 모습 ⓒ 정판수 얼음, 어름, 으름. 이 셋은 발음이 비슷하지만 그 뜻은 전혀 다르다. 얼음에 대해선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어름은 '두 사물의 끝이 맞닿은 자리'를, 으름은 산에 야생하는 열매 중 하나를 가리킨다. 달내마을에는 으름이 지천으로 열린다. 산 속 깊이 가지 않더라도 우리 집 뒤와 옆만 둘러봐도 보이는 게 칡넝쿨 아니면 으름덩굴이다. 좀 크다 싶은 나무를 올려다보면 어김없이 둥치를 둘둘 감고 올라가 있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으름은 아주 생소한 열매일 것이다. 나도 이 나이 되도록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먹어봤다. 그러나 만약 달내마을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먹기 싫도록 먹을 수 있으니. 어제(27일)만 해도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현관 앞 소쿠리에 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으름이었다. 그저께 산책길에는 덜 익은 게 더 많았는데 소쿠리에는 잘 익어 알몸을 드러낸 것만 있었다. 아내에게 눈짓하자 오전에 동네 할머니들과 뒷산에 다래 따러 갔다가, 다래는 거의 따지 못하고 으름만 따왔다는 것이다. ▲ 27일 아내가 따온 으름들 ⓒ 정판수 으름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맛이 느껴진다고 해서 얼음에서 으름으로 전이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열매만 먹어본 사람은 그 맛에 반해 으름을 매우 맛있고 이로운 과일로만 알 것이다. 그러나 이 으름덩굴은 달내마을에선 지긋지긋한 존재들이다. 유실수란 유실수엔 다 감아 올라 목을 조른다. 유실수뿐 아니라 나무란 이름만 붙어도 다 올라붙는다. 칡덩굴의 행패를 아는 이들은 그것과 비교하면 된다. 칡덩굴이 주로 옆으로 많이 뻗어간다면(가끔 위로 뻗기도 한다), 으름덩굴은 위로만 뻗어 나뭇가지를 챙챙 감는다. 목을 조르는 데 견디지 못한 나무는 죽거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래선지 우리 밭 아래 언덕에 있는 뽕나무, 감나무, 깨감나무 등은 신음하고 있다. 이런 짓거리(?)를 모르고 먹으면 정말 맛있다. 연두색 열매가 누런빛을 띠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데 그걸 입에 살짝만 대도 맛이 혀에 감친다. 사르르 혀를 녹인다. 입에 닿는 끈적끈적한 게 기분 나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건 맛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 뿐이다. 으름을 '조선바나나(혹은 한국바나나)'로 부르는 이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조선바나나'란 말에는 바나나만큼 맛있다는 의미도 들어 있지만 결국은 바나나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 허나 어찌 바나나 맛을 으름 맛에 비길 수 있으랴. ▲ 잘 익은 으름 5형제. 보통 3개쯤 열리는데, 간혹 7~8개가 열리기도 한다. ⓒ 정판수 사실 으름엔 먹을 것보다 씨가 더 많다. 겉으로 볼 때는 허연 막으로 덮여 제법 먹을 게 있을 것 같지만, 안은 새까만 씨로 가득하다. 그래서 귀찮다고 씨를 씹어 먹는 이가 있는데 쓴 맛 때문에 먹은 걸 도로 다 내뱉게 된다. 그러나 달내마을에서는 예부터 씹지 않고 삼킨 씨가 위장을 깨끗이 청소해준다 하여 으름시를 그대로 삼킨다. 또한 한방에서는 이 검은 씨를 예지자(叡智子)라 한다. 이뇨제와 요도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본다. <동의보감>에서는 으름 줄기를 잘라 말린 것을 통초(通草)라 하여 12경락을 서로 통하게 하는 약초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으름을 술로 담아 한 잔씩 마시면 식욕증진, 피로회복, 보혈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다만 경험에 따르면 으름주는 술로서는 맛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달내마을에서 잘 익은 으름이 손님을 반기는 계절이 되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처럼 맛있는 으름이 기다리고 있다. 으름주 담그는 법 ▲ 약간 덜 익은 으름, 반으로 쪼개 술을 넣고 밀봉함, 잘 익은 으름주(왼쪽부터). 1. 재료 으름과 소주(과실주용)의 비율은 1대 2 정도가 적당하다. 으름 6개에 소주 한 병(1.8ℓ)이 적당하다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렇게 하면 술맛이 독해지고 약효도 떨어진다. 2. 담그는 순서 ① 으름을 껍질째 깨끗이 닦아(씻는 것보다 닦는 게 좋다) 반으로 쪼갠다. ② 병에 으름을 넣고 소주를 부어 밀봉 저장한다. ③ 3개월간 숙성한 후 거르고 여과한 뒤 보관한다. ④ 거른 걸 다시 2개월쯤 보관한 뒤 마신다(술을 적게 넣은 건 노란빛이 나며, 술을 많이 넣으면 불그스름한 빛깔이 된다). 3. 주의사항 ① 완전히 익어 벌어진 것보다 덜 익은 으름이 좋다. ② 설탕을 넣지 않으면, 약효는 좋아지지만 독한 맛이 느껴진다.